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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롤러 더비와 서브컬처: 음악, 패션, 정체성의 융합

by 박이그린 2025. 4. 8.

롤러 더비와 서브컬처: 음악, 패션, 정체성의 융합

 

1. 스포츠 그 이상의 문화: 롤러 더비란 무엇인가?

롤러 더비(Roller Derby)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문화현상이다. 1930년대 미국에서 대중 오락으로 시작된 이 스포츠는 원형 트랙을 따라 인라인 혹은 롤러스케이트를 탄 선수들이 팀을 나눠 경쟁하는 격렬한 경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현대 롤러 더비’는 2000년대 초반, 텍사스 오스틴을 중심으로 부활하며 전혀 다른 궤도로 진화했다. 당시 ‘Texas Rollergirls’라는 비영리 여성 리그가 등장하면서, 이 운동은 더 이상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닌, 페미니즘적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담아내는 스포츠로 거듭난 것이다.

전 세계 수백 개의 자발적 리그가 탄생했으며, 특히 여성과 퀴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운동’을 ‘표현’의 도구로 삼고, 경기장은 곧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었다. 이를 통해 롤러 더비는 서브컬처와 결합하며, 스포츠와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2. 스타일은 곧 저항: 패션과 레디컬 셀프 패션의 실천

롤러 더비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단연 ‘패션’이다. 레깅스에 문신, 네트 스타킹, 강렬한 아이 메이크업, 펑크 스타일의 유니폼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이 스타일은 ‘레디컬 셀프 패션(Radical Self-Fashion)’ 개념과 연결된다. 이는 전통적인 성별 규범이나 미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스타일링함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회학자 벨 훅스(bell hooks)는 “자기 몸을 스타일링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통해 ‘존재 자체가 저항이 되는 방식’을 강조했다.

예컨대, 퀘벡의 롤러 더비 리그 ‘Montreal Roller Derby’ 소속 선수 중 일부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의상과 이름을 사용하며, 이로써 경기장은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무대가 된다. 또 일부 리그에서는 팀명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도 많은데, ‘Hell Marys’, ‘Slaughter Daughters’ 같은 팀명은 유머와 반항 정신을 동시에 담고 있다.

 

3. 음악으로 말하다: 펑크와 록의 리듬 위에서

롤러 더비 경기장에는 항상 음악이 흐른다. 대부분 펑크 록, 하드코어, 록앤롤 등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든 음악 장르가 배경음악으로 선택된다. 이들 장르는 롤러 더비가 추구하는 저항과 해방의 메시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예컨대 영국의 리그 ‘London Rockin’ Rollers’는 이름부터가 록 음악에 대한 헌사로, 경기장의 플레이리스트도 전통적인 록 아이콘부터 인디 밴드까지 다양하다. 미국의 ‘Gotham Girls Roller Derby’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펑크 음악 신(scene)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팀원들 다수가 직접 밴드 활동을 하거나 공연을 열기도 한다.

음악은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고 선수의 리듬을 구성할 뿐 아니라, 팬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스포츠와 음악, 그리고 그것이 담아내는 저항적 정서를 함께 느끼기 위해서이다.

 

4. 롤러 더비의 서브컬처적 확산: 영화, 전시, 문학 속 진입

롤러 더비는 문화적 콘텐츠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 『Whip It』(2009)이다. 드류 배리모어가 감독하고 엘렌 페이지(현 엘리엇 페이지)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롤러 더비를 매개로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주인공이 ‘레이저’라는 더비 이름으로 자아를 찾고, 억눌린 욕망을 해방하는 과정을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실제 텍사스 롤러 더비 선수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문화적 현실성을 더했고, 전 세계에 롤러 더비의 정체성과 매력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예술 전시에서도 롤러 더비는 페미니즘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20년 MoMA PS1에서 열린 전시 Theater of Operations: The Gulf Wars 1991-2011에서는 롤러 더비의 유니폼과 사진, 인터뷰가 ‘저항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전시되었다. 독일의 여성문화센터에서는 롤러 더비를 주제로 한 자인(zine)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스포츠의 공동체적 정체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기록하기도 했다.

 

5. 롤러 더비와 정체성의 정치: 다름을 연대하는 운동

현대 롤러 더비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를 실천하는 운동장이자, ‘다름’을 연대하는 공동체적 공간이다. 여성, 퀴어, 트랜스젠더, 유색인종, 비주류 계층 등 기존 스포츠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이 롤러 더비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다.

‘Black Roller Derby Network’는 그 대표적 예다. 이 조직은 흑인 여성 선수들이 롤러 더비 내에서 겪는 차별과 억압을 가시화하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성평등 이슈를 적극적으로 연계한다. 미국 내에서는 ‘Team Indigenous Rising’이라는 팀이 존재하며, 원주민 커뮤니티와 롤러 더비를 결합해 문화 보존과 자긍심 향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경기 전 의례와 응원 구호에 전통 의식을 포함시키며, 스포츠를 통해 문화적 뿌리를 복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롤러 더비는 다층적인 정체성이 얽힌 복합적 공간이며, ‘경쟁’보다는 ‘공존’과 ‘연대’를 우선시하는 스포츠이자 사회운동이다.

 

6. 국제적 확산과 로컬 정체성: 다양한 문화권 속의 변용

롤러 더비는 현재 60개국 이상에서 활동 중이며, 각국의 문화에 맞게 다채롭게 변형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Tokyo Roller Girls’가 중심이 되어 전통적인 여성상에 도전하며, 패션 스타일에 일본 스트리트 패션 요소를 가미한다. 이 팀은 하라주쿠 문화와 롤러 더비를 결합하여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고, 일본 내에서도 점차 주목받고 있다.

멕시코의 ‘Roller Derby Mexico City’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운동과 여성 해방 운동을 롤러 더비와 결합했다. 

‘Ni Una Menos(단 한 명도 더는 죽지 말자)’ 캠페인과의 연계 활동을 통해, 성폭력 반대 메시지를 담은 경기를 조직하거나 관련 교육 활동을 병행한다. 이런 방식은 단순히 스포츠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진화했다.

한국의 경우, ‘Seoul Roller Derby’는 소규모지만 강한 커뮤니티 의식을 바탕으로 활동 중이며, 국제 토너먼트에도 참가하면서 아시아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젠더 다양성과 여성의 사회 진출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워크숍을 통해 스포츠를 매개로 한 공론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결론: 롤러 더비, 스포츠를 넘어선 서브컬처의 미래

롤러 더비는 ‘스포츠’의 정의를 다시 묻는 질문이자, ‘서브컬처’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음악, 패션, 언어, 공동체, 정치, 정체성 - all in one. 이처럼 롤러 더비는 단순한 경기 이상으로, 오늘날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는 단지 비주류 스포츠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답변일 수 있다. 통제되지 않은 속도와 충돌, 그리고 그 안의 질서 있는 연대 - 그것이 롤러 더비가 말하는 미래다.